오이시 요시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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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이시 요시카네는 아코 번의 필두 가신 오이시 요시오의 장남으로, 1688년에 태어났다. 1701년,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을 휘둘러 아사노가 할복하고 아코 번이 폐지되자, 그는 아버지와 함께 복수를 계획했다. 1702년, 에도로 내려가 기라 요시히사의 저택을 습격하는 데 참여하여 후문대 대장을 맡았고, 이후 47인의 아코 낭사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할복 명령을 받고 1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센가쿠지에 묻혔다. 그는 당시 큰 체격으로 용감한 인물로 묘사되며,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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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인은 아코번의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의 아내이자 오오이시 요시카네의 어머니이며, 남편의 복수 이후 아이들을 양육하고 출가하여 히로시마번에서 은거하다 사망했다. - 오이시씨 - 오이시 요시오
오이시 요시오는 아사노 나가노리를 섬기다 아코 번이 폐지되자 46명의 로닌과 함께 키라 요시나카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할복한 인물이며, 일본에서 이상적인 사무라이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 아코 낭사 - 오이시 요시오
오이시 요시오는 아사노 나가노리를 섬기다 아코 번이 폐지되자 46명의 로닌과 함께 키라 요시나카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할복한 인물이며, 일본에서 이상적인 사무라이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 아코 낭사 - 야다 스케타케
에도 시대 아코번사이자 아사노 나가노리의 가신이었던 야다 스케타케는 겐로쿠 아코 사건에서 기라 요시히사 저택 토벌에 참여한 후 할복한 인물로, 무예는 뛰어났지만 급한 성격에 낭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1688년 출생 - 알렉산더 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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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시 요시카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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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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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이시 요시카네 |
별명 | 구라노스케(良雄) 후실(不室) |
계급 | 낭인 |
생년월일 | 1659년 |
사망일 | 1703년 3월 20일 (음력 2월 4일) |
출신 | 하리마국 아코 번 |
가족 | 아버지: 오이시 요시치카 어머니: 도다 야스나가의 딸 부인: 리쿠 자녀: 오이시 요시타카, 오이시 다이사부로, 오이시 고자에몬, 오이시 쓰네 |
상세 정보 | |
다른 이름 | 오이시 구라노스케 요시오 (大石内蔵助良雄) |
로마자 표기 | Ōishi Yoshikane |
활동 시기 | 겐로쿠 시대 |
주요 사건 | 아코 사건 |
직책 | 아코 번 가로 |
봉록 | 1500석 |
자녀 | 오이시 요시치카(大石良金) 오이시 요시타카(大石良隆) 오이시 다이사부로 노리카타(大石大三郎良方) 오이시 고자에몬 노리카네(大石小左衛門良金) 오이시 쓰네(大石つね) |
아버지 | 오이시 요시치카(大石良欽) |
인물 정보 | |
가명 | 마쓰노조(松之丞) 스케고로(助五郎) |
아명 | 지카라(主税) |
2. 생애
겐로쿠 원년(1688년), 하리마국아코번 필두 가로 오이시 요시오의 적자로 아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았다고 한다.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4월 21일),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성 마쓰노오오로카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을 휘두른 사건으로 할복하고 아코 번이 개역되자, 당시 14세였던 요시카네는 원복 전이었다.
아코성 인도 후, 아버지 요시오는 번정 잔무 처리를 맡았다. 그동안 요시카네는 생모 등과 다지마 도요오카번 가로 이시즈카 츠네키미의 저택으로 갔다. 여기서 와키자시를 받았다.
이후 요시오가 교토야마시나로 이주하자 요시카네 등도 이주한다. 요시오는 로닌이 된 구 아코번사들에게서 혈판장을 받고, 아사노 가문 부흥 운동을 했다. 요시카네는 12월에 원복하여 의맹에 참여했다. 겐로쿠 15년(1702년) 4월, 요시오는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은 친정으로 보냈지만, 요시카네는 야마시나에 남아 아버지와 함께했다.
7월, 아사노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가 히로시마아사노 종가에 영예탁되면서 아사노 가문 부흥이 좌절되자, 요시오는 복수를 결의했다. 9월 19일(11월 8일), 요시카네는 먼저 에도로 내려가[1] 가키미 사나이라고 칭하며 니혼바시혼초의 고야마야 야헤이 집에 머물렀고, 요시오도 뒤따라왔다.
12월 15일 새벽, 47명의 아코 낭사들은 기라 저택에 침입했고, 요시카네는 뒷문대 대장을 맡았다. 검호들이 많은 뒷문에서 전투가 주로 벌어졌고, 책임이 컸다. "어리지만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타케바야시 타카시게가 기라 요시히사를 참살하고, 센가쿠지로 향했다.
막부는 낭사들을 사대 명가에 맡겼고, 요시카네는 마쓰다이라 사다나오 저택에 맡겨졌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들을 죄인으로 엄하게 대우했다.[2] 철포 감시, 순찰, 불침번을 두고 담배, 난방도 금지했다. 처분 전부터 전원 할복 시 개개인까지 결정해[3] "호소카와의 물(미즈노 타다유키)은 맑지만, 대해(모리 가이노카미)의 먼 곳(마츠다이라 오키노카미)만이 흐리다"는 비판을 받았다.[4]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요시카네는 할복했다. 향년 16세, 최연소였다. 센가쿠지에 묻혔고, 계명은 인상수검신사다.
개개인이 공을 세운 듯 요시카네의 머리를 흔들어 검시에게 보여 피가 흩어졌다는 매화나무가 "주세이 매"로 센가쿠지에 있다. 아코번 보제사 카가쿠지에는 요시카네 계명에 원호 초륜원이 붙어 있다.
2. 1. 습격 전후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4월 21일),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성 마쓰노오오로카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을 휘둘러 아사노 나가노리가 당일 할복하고 아코 번이 개역되었을 때, 오이시 요시카네는 세는 나이로 14세였으며, 아직 원복 전이었다.아코성을 막부의 수성사 와키사카 야스테루에게 인도한 후, 아버지 오이시 요시오는 엔린지에서 번정 잔무 처리를 맡았다. 이 사이인 5월 11일(6월 16일), 요시카네는 생모 리쿠와 남동생 키치노신, 여동생 쿠우와 루리 네 명을 데리고 리쿠의 친정인 다지마 도요오카 번 가로 이시즈카 츠네요시의 저택으로 향했다. 도요오카 체류 중에 요시카네는 이시즈카 츠네요시로부터 와키자시를 받았다.
그 후, 7월에 오이시 요시오가 교토 야마시나로 이주하자, 리쿠와 요시카네 등도 야마시나로 옮겼다. 이때 오이시 요시오는 로닌이 된 구 아코 번사들로부터 서약서(혈판장)를 받고, 아사노 가문 부흥 운동에 진력하고 있었다. 요시카네는 12월에 원복하여 의맹에 참여했다. 이듬해 겐로쿠 15년(1702년) 4월, 오이시 요시오는 아내 리쿠와 이혼하고, 리쿠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도요오카로 돌아갔지만, 요시카네는 야마시나에 남아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했다.
7월, 아사노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가 히로시마 아사노 종가에 평생 맡겨지는 것이 결정되면서, 아사노 가문 재건이 절망적이 되자, 오이시 요시오는 마루야마 회의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복수할 것을 결의한다. 9월 19일(11월 8일), 요시카네는 오이시 요시오보다 먼저 에도로 내려와, 가키미 사나이라고 자칭하며 니혼바시 이시초 3초메(현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혼초)의 여관 오야마야 야베에 점에 머물렀다.[1] 뒤이어 내려온 오이시 요시오도 이곳에 머물렀다.
12월 15일 새벽, 47명의 아코 낭사들은 기라 요시히사의 저택에 쳐들어갔고, 요시카네는 후문대의 대장을 맡았다. 격투 끝에 낭사들은 기라 요시히사를 죽이고 숙원을 풀었다. 아코 낭사 일행은 센가쿠지로 방향을 틀어, 아사노 나가노리의 묘 앞에 기라 요시히사의 목을 올리고 복수를 보고했다.
막부는 아코 낭사들을 네 개의 다이묘 가문에 나누어 맡겼는데, 요시카네는 호리베 다케쓰네, 오타카 다다오 등 9명과 함께 마쓰다이라 사다나오(히사마쓰-이요 마쓰야마 번) 저택에 맡겨졌다. 이듬해인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막부는 아코 낭사에게 할복을 명했고, 요시카네는 같은 집에 맡겨진 10명 중 최초로 할복을 명령받았다. 마쓰다이라 가 가신 하가 초에이의 가이샤쿠로 할복했으며, 향년 16세로 최연소 낭사였다.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와 같이 다카나와 센가쿠지에 묻혔다. 계명은 인상수검신사. 아코 번 보다이지인 가가쿠지에서는 요시카네의 계명에 원호인 초린인이 덧붙여졌다.
2. 2. 사후
요시카네는 원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식이 없었고, 동생 요시유키도 출가 중에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습격 당시 유아였던 3남 오이시 다이사부로 요시야스는 6대 쇼군 이에노부 재임 시기에 사면되어, 아사노 가 히로시마 본가에서 1500석으로 사관하여 오이시 성씨로 복귀했다.[5] 센가쿠지에는 요시오, 요시카네 부자 외에 다이사부로부터 마지막 오이시 가문 당주인 다쿠조(요코타류 오이시 씨)[6]까지 오이시 가문 역대 묘[7]가 현존하고 있다. 아코의 가가쿠지에서는 세자에몬 계열(오이시 무인의 자손)이 오이시 가문의 제사를 계승했다.3. 용모와 인물
눈이 치켜 올라간 거대한 체구였다[8] . 니시키에 등에서도 그렇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9] (오른쪽 상단 이미지 참조). 신장은 5척 7촌(172cm 전후)이었다. 젊지만, 일찍부터 침착했다. 하라 모토토키가 호리베 야스노리에게 보낸 서간에 "주세이는 나이보다 낫다"라는 구절이 있다.
4. 일화
- 나가노리는 자식이 없었기에, 학식이 깊고 총명한 요시카네를 어릴 적부터 친자식처럼 귀여워했고, 요시카네는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1]
- 어릴 적 성에서 배알할 때, 말을 하사받고 싶다고 당당하게 청원하여 영주에게 무사의 아들답다고 칭찬받았다는 일화가 있다.[1]
- 가로가 되었다면 아버지 이상의 능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반목하여 아버지 곁을 떠나려 했던 호리베 등 급진파의 에도 구미에 스스로 인질을 자청하여 아버지보다 먼저 에도에 들어갈 정도의 판단력과 통솔력이 있었다.[1]
- 요시카네는 부모의 이혼을 알지 못하고 할복했다. 요시오는 구마모토 번 저택을 경유하여 오메쓰케(공의 최고의 효조쇼) 앞으로 제출한 자필 친척 서류에 아내 리쿠를 이혼한 사람으로 썼지만, 요시카네가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를 경유하여 제출한 친척 서류에는 리쿠를 어머니로 인정하고 '양친'으로 기재했다.[1]
- 당시로서는 드물게 죄인 취급을 받지 않고, 저택 내에서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었다고 한다.[1]
- 요시카네가 연말에 위탁처에서 유행하던 감기로 고열이 나 접대역을 당황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
- 할복 당일, 장수로서 최후까지 대우받아 가장 먼저 할복하고 수급 검시를 받았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여유 있는 태도에 검시역들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1]
5. 연애
겐로쿠 15년(1702년), 교토 체류 중에 시조가와라의 이로코(가부키 배우) 아이야마 고노스케와 슈도(남색) 관계를 맺었다는 설이 있다.[1]
6. 창작
후시미에서 방탕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요시카네도 촌부 차림으로 요시와라에서 놀며 "남자는 경험했지만, 여자는 처음"이라며 시타야 구루마자카 정에 사는 마쓰키치라고 자칭했다. "처음이시라네요. 괜찮아요"라는 기녀 오쿠마(혹은 코하루)에게 "송구합니다"라고 대답하다가 사무라이라고 들통났다.[10]
7. 유품
칼 도모쿠니 2자 2치 5푼 - 아사노 나가노리에게서 받은 것이다. 센가쿠지 주지 슈잔이 매각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8. 기타
강담사 칸다 마쓰노죠(후에 6대 칸다 하쿠잔을 습명)의 예명은, 아코 의사전을 매우 좋아하는 스승 3대 칸다 쇼리가 요시카네의 어린 시절 이름에서 따서 지었다.[11] 다만 하쿠잔(마쓰노죠)은, 칸다 산요(대사부)가 "아코 의사전은 유행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도 있어서[12], 의사전에 대해 (자신에게도 여러 개의 레퍼토리가 있지만) "지금 세상에 그만큼의 니즈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쿠가와 덴이치보"나 "덴포 육화선" 쪽이 아직 매력적이고, 연작물로서 할 가치가 있다"라고 발언하고 있다.[13]
9. 오이시 요시카네를 다룬 작품
오이시 요시오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아코 사건을 다룬 충신장이 있다.
9. 1. 관련 예능
하시 유키오의 EP 싱글 "미소년 충신장"이 1962년 8월 5일에 발매되었다.[1]참조
[1]
웹사이트
"共同通信"2010年1月30日付
https://web.archive.[...]
2010-01-30
[2]
서적
赤穂浪士 紡ぎ出される忠臣蔵
1999
[3]
문서
波賀清太夫覚書
松山藩
[4]
문서
「アル書ニ載ス。此時御預リ四家ノ優劣ヲ詠ゼシ歌」『浅野一乱記』
[5]
문서
『翁草』巻百六十七、巻百九十
[6]
서적
大石家の墓
中央義士会
2008
[7]
문서
赤穂藩家老初代の[[大石良勝]]は[[臨済宗]]のため泉岳寺に墓がない。
[8]
서적
忠臣蔵四十七義士全名鑑 子孫が綴る、赤穂義士「正史」銘々伝
赤穂義士会
2007
[9]
서적
大石主税藤原良金
1893
[10]
기타
元禄女太陽伝
[11]
문서
姉弟子の[[神田阿久鯉]]も、瑤泉院の名「阿久里」に因む。
[12]
서적
人生を豊かにしたい人のための講談
マイナビ出版
2020-10
[13]
서적
神田松之丞 講談入門
河出書房新社
201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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